장절공묘역옆에 고구려고분이 있다.
남한지역에서 흔히보기어려운 양식으로 되어 있다고한다.
장절공묘역의 전체 안내도.
비룡지
신숭겸장군의 동상
지방 기념물 제 21호로 지정된 신숭겸의 묘역에는 충절문이 있고,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신순겸의 영정을 모신 사당, 장절사가 있다.
조선조의 학자이며 시, 서, 화의 대가로 이름난 자하의 글씨로 만든 신도비, 기념관,
홍살문이 있다.
.
장절공 신숭겸
"태봉 말기 및 고려 초기의 무신으로, 고려의 개국공신이다.
원래 이름은 능산(能山)이며, 시호는 장절(壯節), 평산 신씨의 시조이다.
몸이 장대하고 무용이 대담 했으며 지략(智略)과 궁술(弓術)이 뛰어났다.
918년 궁예가 흉폭 무도하여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협력하여
"폭군을 폐위하고 현명한 사람을 세우는 것은
천하의 대의이니 당시 장수인 왕건은 너그럽고 어진도량으로 난세를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킴에 덕망이 높았다.
청컨대 공은 은(殷)과 주(周)의 옛일을 본받아 실행하셔야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나는 충의를 신조로 삼고 있으니 왕이 비록 난폭할지라도 어찌 감히 두 마음을
가지겠는가?
"라면서 왕건이 일단 거절하였다.
그러나 신숭겸 등은 "시기란 만나기 어렵고 알고도 놓치기 쉬운 것인데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는 법입니다.
"라고 밝혀 자신들의 거사가 천명임을 강변하였다. 결국 거사를 왕건이 허락하자
그를 고려의 태조로 세웠다.
후삼국인 궁예를 내 쫒고 고려를 세운 왕건이 점차 세력을 넓혀가자 불안을 느낀
신라 54대 경애왕이 고려와 화친했다.
이에 후백제의 견훤은 신라를 침공했고, 경애왕은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나
지원군 10,000여 명이
도착도 하기전에 견훤에게 죽임을 당했다.
왕건은 견훤이 신라를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신숭겸장군과 5,000 여명의
정예군을 이끌고
신라를 도우러 갔으나 오히려 견훤의 군사에게 포위되어 왕건의 목숨이 위태롭자
公이 태조와
얼굴이 흡사하여 태조를 대신해
태조를 숲속에 숨기고 태조의 옷을 갈아입고 어가에 올라 김략과 싸우다 전사하니
견훤의 군사가 公의 머리를 배어감에
포위가 풀리고 태조가 죽음을 묘면하였다.
이후 신숭겸의 시체를 발견한 태조 왕건은 크게 슬퍼하여 송악으로 철수할 때
참수되어 머리가 없던 신숭겸의 시신에 금으로 만든 머리 모형을 만들어
장사지내고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견훤과의 격전지였던 대구에는 아직도 파군재, 독좌암, 왕산, 안심, 해안, 반야월,
백안, 연경, 살내 등의
많은 지명이 남아있어 당시의 격전지임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4대 명당중 한 곳인 신숭겸 장절공 묘역(申 壯節公 墓域)에는 봉분이 셋이 있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는 신숭겸 장군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으며 묘역에는
묘와 묘비, 신도비, 사당, 영정,
동상이 있고, 묘에는 봉분이 세 개가 있어 특이한 형태로 되었다.
1805년에 김조순이 비문을 짓고, 신위가 글씨를 쓴 신도비에 의하면 봉분이 3개가 있다.
신숭겸이 전사하자 견훤의 후백제군들이 목을 베어 갔으므로
고려 태조는 순금으로 두상(頭像)을 만들어 시신과 같이 매장하고
어느 것에 시신이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게 하여 도굴을 방지하려 하였다....
스산한 날씨탓인지 찾는이들은 별로 없었다.
어릴때 아이들 데리고 놀러왔던 기억도나고...
2013년11월2일 토요일 오후 가평용추계곡을 다녀오다 들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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