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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유적지/남양주

by 무던 2014. 3. 25.

2014년 3월23일 일요일.

 

다산 기념관.

 

다산정약용

다산은 1762년(임오년 영조38년) 음력 6월 16일,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당시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에서 아버지 나주정씨(羅州丁氏) 재원(載遠) 과 해남윤씨(海南尹氏)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다산의 아명은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 용보(頌甫)이고 호는 사암(俟菴), 열수 (冽水),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 (門巖逸人) 등이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다

 

 

ㅋ/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

 

 

 

묘소에서 바라본 생가의 뒷모습.

묘소.

사진을 찍을수 없다는 데 모르고....ㅋ

 

좌측은 묘소     우측은 생가

 

 

다산 기념관.

 

 

녹로

 

 

다산의 저서들

 

 

총 500여권을 헤아리는 그의 《여유당전서》는 대체로 6경4서·1표2서·시문잡저 등 3부로 분류할 수 있다. 

 1표2서의 대강을 살펴보면,

 

 


첫째 《경세유표 經世遺表》 48권이 있으나 미완본이다.

관제·군현제도·전제(田制)·부역·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과제·해세(海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경영을 위한 제도론으로서 현실적 실용여부는 불구하고 기강의 대경대법을 서술하여 구방(舊邦)을 유신하고자 하였다.


둘째 《목민심서 牧民心書》 48권이 있다.

 현재의 법도로 인민을 다스리고자 한 것이니 율기·봉공·애민을 3기(紀)로 삼았고 거기에다가 이·호·예·병·형·공을 6전(典)으로 삼았으며 진황(賑荒)을 끝으로 하였다. 부정행위를 적발하여 목민관을 깨우치게 함으로써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록 하였다.

셋째 《흠흠신서 欽欽新書》 30권이 있다.

 인명에 관한 옥사를 다스리는 책이 적었기 때문에 경사(經史)에 근본하였거나 공안(公案)에 증거가 있는 것들을 모아 옥리들로 하여금 참고하게 함으로써 원한의 소지를 없애도록 하였다. 이로써 6경4서로써 수기하고 1표2서로써 치인하게 하여 수기치인의 본말을 갖추도록 하였다.

실학박물관은 입장하지않고 다음 목적지로...

날씨가 더워서  여름한나절인듯한 착각이.

제비꽃이 여기저기에 무리지어.

 

다산유적지앞이 다산길 2코스 종점

사진우측 동그라미한 부분이 다산유적지가 있는곳이다.

 

 

 

남양주다산유적지외에 강진 다산초당과 해남 대흥사에도 유적들이 있다고한다.

강진 다산초당은 둘러봤던곳이고 기회가 되면 해남 대흥사에도 한번은?

강진 다산초당

강진 다산초당

강진다산초당

강진만을 한눈에 굽어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선생이 강진 유배 18년중 10여년 동안을 생활하시면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500여권에 달하는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 하였던 곳이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진주목사를 지 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 참의 등을 지냈으며 1801년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 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초기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 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 겨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 치고 저술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노후로 붕괴 된 다산초당을 1957년 복원하였고 그 후 다산선생이 거처하였던 동암과 제자들의 유 숙처였던 서암을 복원하였다. 다산초당에는 이밖에도 다산선생이 「丁石」이라는 글 자를 직접 새긴 바위, 차를 끓이던 약수인 약천, 차를 끓였던 반석인 다조, 연못가운 데 조그만 산처럼 쌓아 놓은 연지석가산 등 다산사경과 다산선생이 시름을 달래던 장소에 세워진 천일각이라는 정자가 있다.

강진 다산초당 주변길연지석가산천일각

다산유물전시관

다산유물전시관

다산유물전시관은 다산초당 남쪽 800m 지점에 위치하며, 다산 정약용선생의 생애와 업적 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영정, 다산연보, 가계도, 학통, 다산 의 일생, 다산의 업적과 유물 등이 판넬과 조형물로 입체감 있게 전시되어 있으며, 좀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자 할 때에는 컴퓨터를 활용한 터치스크린에서 검색할 수 있 다. 영상실은 다산의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영상물이 약7분 동안 상영되는데 관람 객이 영상실에 들어가면 자동으로 상영되므로 누구나 불편없이 관람할 수 있다.전시 관 앞 광장에 대형버스 15대 이상이 주차할 수 있어 학생들의 수학여행 등 단체관람 에도 아무 불편이 없다

 

 

 

해남 대흥사

대흥사 대웅전

해남의 대흥사는 해남의 진산이라 할 수 있는 두류산 자락에 자리한 아름다운 사찰이 다. 원래 이름이 대둔사였는데 한동안 대흥사로 바꿔 부르다 최근에 다시 대둔사로 바 꿔 현지 사람들에게는 대흥사라는 이름이 더 친숙하다. 대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2교구 본사로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배출한 명사찰이 다. 경내에는 추사 김정희이 필치로 새겨진 현판, 서산대사의 위국충정을 기리는 표충 사, 다성(茶聖)이라 일컫는 초의선사 동상, 성보박물관 등 사찰의 내력을 알려주는 유 적들이 즐비하다. 대흥사는 주변의 수려한 풍광과 산세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켰던 서산대사로 유명하다.

그러나 대흥사 하면 일지암(一枝庵)과 다도문화를 부흥시켜 차 문화의 성인이라 일컫는 다성 초의스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불교에 귀의한 스님 이면서도 초의는 당대 유가의 명사, 시인들과 폭넓은 교분을 가졌는데 다산과의 인연 역시 빼 놓을 수 없다. 대둔사는 12대강사로 백련사에 있으면서 다산초당에 유배와 있 던 다산과 가깝게 지냈던 혜장에 의해 만난 두사람은 속세의 나이를 뛰어넘어 깊게 사 귀게 된다. 이 때(1809년) 다산은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어 있었으며 초의는 24살의 건장한 청년이었다.

대흥사 마애여래좌상

혜장과 사귀면서 본격적인 차생활을 시작하였던 다산은 초의에게서 차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 초의는 다산에게서 주역과 시문을 배웠다. <동다기>와 <다신전>을 지어 후인 들에게서 조선 차의 중흥조로 불리는 초의는 유학자인 다산과 속세와 산문의 경계를 뛰어넘어 교분을 쌓는데 이 인연은 다산의 두 아들인 학연과 학유에게까지 이어진다. 다음은 여름 날 장마비에 갇혀 초당의 다산을 만나러 가지 못하는 초의의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時 (阻雨未往茶山草堂)의 일부이다. 장마비가 괴롭게 서로를 막으니 채비를 갖추고도 스무날을 보냈다 어른의 분부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니 어디에도 내 진심 하 소연할 곳 없구나. 대흥사에서 두륜봉 쪽으로 걸어서 40여분 걸리는 산중턱에 일지암(一枝庵)이 있다. 이 곳은 초의선사가 39세인 1824년에 지어 40여년간 기거한 한국 차문화 중흥의 상징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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