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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기.인천

서울역사/구 서울역

by 무던 2019. 12. 7.

 2019.12.4

친구들과 만나기위해찾은 서울역/그 옆에 있는 구 서울역사

 

기차 구르는 소리가 천둥 치는 같아, 서울역사


일제 강점기 때 서울의 이름은 경성이었어요. 그래서 지금의 서울역은 원래 경성역으로 불렸어요. 경성역은 한반도 철도의 중심이었을 뿐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으로 가는 중간이었어요. 그래서 언제나 외국인이나 한국인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이 건물은 지금은 역으로 쓰이지 않고 문화 공간으로 이용할 계획이에요.

불을 내뿜는 수레

1889년 어느 날, 미국 외교관 생활을 마친 이하영이 궁궐로 갔어요. 그리고 고종과 관리들 앞에 모형 철도를 펼쳐 놓았지요. 철길을 만들고 그 위에 기차를 올려놓아 움직이게 했습니다. 비록 모형이었지만 이 땅에 들어온 첫 번째 기차였지요.

“이것이 화륜거(기차의 옛 이름으로 ‘불을 뿜는 수레’라는 뜻)이옵니다. 사람은 물론이고 무거운 물건도 멀리까지 실어 나를 수 있사옵니다.”

고종과 신하들은 모형 철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고종은 기차를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어요.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899년 9월 18일, 검은색 증기 기관차가 노량진과 제물포 사이를 달리기 시작했어요. 우리나라의 첫 철도인 경인선(서울과 인천을 잇는 철도)이 운행을 시작한 것이에요. 경인선은 다음 해 한강 철교가 완성되자 서대문까지 들어왔어요.

당시 기차는 놀랍고 신기한 물건이었어요. 멀쩡한 이름을 놔두고 ‘쇠송아지’, ‘검은 괴물’, ‘축지법(먼 거리를 빨리 이동하는 비법)을 쓰는 쇠바퀴’, ‘철마’ 라고 불렸어요.

철도 개통식이 열리던 날, 처음 기차를 타 본 독립신문 기자는 이런 기사를 썼어요.

“화륜거 구르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고 연기는 하늘로 솟아오르더라. 수레 속에 앉아 창밖을 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움직이는 것 같고 새도 따르지 못하더라. 팔십 리나 되는 인천까지 순식간에 당도하였는데······.”

순식간이라고 하였지만 당시 기차로 서울에서 인천까지는 한 시간 사십 분이나 걸렸어요. 그러나 기차가 생기기 전에는 걸어서 열두 시간, 마포나루에서 배를 타면 여덟 시간이 걸렸으니 꽤나 빠른 것이었지요.

기차가 처음 다니기 시작했을 때 철도 회사는 손님을 모으기 위해 이런 광고문을 내붙였어요.

기차 광고

편히 앉아 사방의 풍경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기차는 이미 인천항에 도착합니다.······한강 철교는 공중에 뜬 무지개 같으니, 기차를 타면 무지개를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 듭니다.

철도의 또 다른 얼굴

그러나 빠르고 편리한 철도 뒤에는 한국인의 슬픔이 배어 있어요.

우리나라의 중요한 철도는 대부분 일본이 건설했어요. 일본은 일찍부터 우리나라의 철도 사업에 눈독을 들였어요. 부산에서 서울까지 철도가 놓인다면 일본 상인이나 군인을 빠르게 실어 나를 수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 일본은 중국의 만주까지 지배하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경부선(서울과 부산을 잇는 철도)을 놓는 일이 전투함을 사거나 군사의 수를 늘리는 것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지요.

일본은 대한 제국 정부를 설득해 경부선 사업권을 얻어 냈고, 다른 나라가 갖고 있던 경인선과 경의선(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철도) 사업권도 사들였어요.

철도 사업이 외국인의 손안에 들어가자 ‘우리 철도는 우리 손으로 놓아야 한다.’는 움직임도 일었어요. 다른 나라에 넘어간 사업권을 찾아오자는 주장도 있었고, 박기종은 철도 회사를 세우기도 했어요. 그러나 어마어마한 사업비와 일본의 방해 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했지요.

한반도의 주요 철도 사업권을 차지한 일본은 군대까지 데려다가 공사를 서둘렀어요. 그와 함께 한국 사람들의 고통도 시작되었습니다. 철도 건설에 필요한 땅을 빼앗기다시피 했고, 농민들은 강제로 끌려가 위험한 일을 해야 했어요. 일본의 횡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어요. 한창 자라는 벼를 뽑아 말의 먹이로 주었고 남의 집을 빼앗아 군인들이 머물게 했어요. 주인이 있는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었고, 나무를 실어 나르려고 농민의 소를 함부로 끌고 갔어요. 그 무렵 신문에는 ‘경부선과 경의선이 지나는 곳에 온전하게 남은 땅이 없고, 열 집에 아홉 집은 비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희생과 눈물 덕에 한국의 철도는 세계에서 가장 싼값에 건설되었어요. 완성된 뒤에도 여전히 한국 사람의 눈물을 자아냈지요. 일본 군인은 기차를 타고 와 지배자처럼 굴었고, 일본에서 만든 물건들을 기차로 실어 와 비싸게 팔았지요. 그러나 한국의 쌀, 소금, 각종 자원은 헐값에 일본으로 실려 갔어요. 그러자 한국의 쌀이 귀해져서 사람들은 비싼 값을 주고 쌀을 사야 했어요.

한국 사람들은 철도에 대해서 나쁜 감정을 갖게 되었어요. 철길 위에 돌이나 막대를 올려놓아 운행을 방해하고, 달리는 기차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깼어요. 의병들은 기차역에 불을 질렀지요.

그러나 경인선에 이어 1905년 경부선, 1906년 경의선 등이 개통되면서 한국인도 기차의 편리함을 깨달았어요. 기차는 중요한 교통편이 되었고 이용도 크게 늘었습니다.

기차 때문에 달라진 생활

기차가 생기고 얼마 안 되었을 때, 한 양반이 기차를 타러 갔어요. 이 양반은 기차가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고 출발한다는 것을 몰랐어요. 그래서 출발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역에 도착했지만 기차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지요. 양반은 역에서 일하는 사람을 붙잡고 버럭 화를 냈어요.

“어허, 갈 길이 바쁜데 기차는 왜 보이지 않는 게냐? 냉큼 불러오지 못할까!”

이미 떠나는 기차 뒤꽁무니에 대고 거기 서라며 고함을 치는 사람도 많았지요. 그러나 기차는 언제나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고, 제시간에 출발했어요.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시간을 정확히 지키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던 사회였어요. 해가 뜨면 일을 시작했고 해가 지면 집에 돌아왔지요. 시간을 재는 방법도 서양과 달라서 하루를 24시간이 아니라 12시간으로 나누었어요. 시간의 가장 작은 단위는 1초가 아닌 1각으로, 약 15분이었어요.

그런데 기차가 정해진 시간에 다니면서부터 한국인도 시간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기차가 한국인들에게 시간을 지키는 방법을 가르쳐 준 셈이에요.

기차역을 중심으로 상점, 은행, 경찰서 등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도시도 생겨났어요. 신의주, 익산(옛 이름은 이리), 대전이 기차역과 함께 발전한 도시이지요.

기차역 때문에 도심지가 바뀌는 마을도 있었어요. 1900년대에 생겨난 신고산 타령은 ‘신고산이 우르르 함흥차 가는 소리에 구고산 큰 애기 밤봇짐만 싸누나.’로 시작해요. 신고산은 함경남도에 있는 기차역 이름입니다.

원래 고산이라는 마을이 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신고산에 기차역이 들어서면서 고산은 구고산이 되어 버렸어요. 그리고 기차역이 들어선 신고산은 새로운 도심지가 되었지요. 신의주 역시 철도가 개통되면서 의주 대신 새로운 도시로 떠올랐어요.

웅장한 역 건물은 누구를 위해 지었을까?

철도역을 중심으로 도심지가 바뀔 정도였으니 모든 기차가 모이던 경성역은 얼마나 번화했을까요?

경성역은 서울의 정문답게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었어요. 아침이면 수원, 인천, 개성에서 새벽 기차를 타고 올라온 학생들이 물결을 이루었고, 화창한 봄날이면 소풍 가는 학생들로 북적였어요. 방학이 시작되면 고향에 가려는 학생들이 한꺼번에 몰려 혼잡했지요.

대회에 나가는 운동선수를 환송한 곳도, 외국에서 온 귀한 손님을 환영한 곳도 경성역이었어요. 지금의 국제공항과 같은 역할을 한 셈이지요.

경성역의 맨 처음 이름은 남대문 정차장으로, 작은 기차역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런데 경부선, 경의선, 경원선, 호남선 등이 연이어 개통되면서 이용하는 사람도 늘고, 실어 나르는 화물도 많아졌어요. 그러자 일본은 역 건물을 현대식으로 짓겠다고 발표했어요.

새로 지은 역은 화려한 서양식 건물로 바깥은 웅장하고 안은 아름답게 꾸몄어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기차역은 도쿄역이고, 두 번째가 경성역이었어요.

왜 일본은 한국에 이렇게 큰 건물을 지었을까요?

일본은 주요 기차역 주변에 일본에서 이민 온 사람들을 살게 하고 군대를 머물게 했어요. 기차역을 중심으로 일본인 마을을 만들다 보니 역 건물도 넓고 큼직하게 지었지요.

경성역을 웅장하게 지은 뒤 일본은 외국인이나 한국인에게 ‘우리가 한국을 이렇게 발전시켰다.’고 자랑했어요. 식민 지배가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었겠지요.

그러나 기차가 없으면 더 불편한 쪽은 일본이었으니, 발전은 결국 한국을 위한 일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이었지요.

바다의 철도, 관부 연락선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자 일본은 부산과 시모노세키 사이에 여객선을 취항시켰어요. 여객선은 시모노세키의 한자어인 하관(下關)과 부산에서 각각 한 글자씩을 따 ‘관부 연락선’이라고 불렀어요. 일본의 수도 도쿄에서 기차표를 사면, 시모노세키에서 관부 연락선을 타고 한국을 거쳐 만주 하얼빈까지 갈 수 있었어요. 관부 연락선은 일본의 침략을 한결 편리하게 만들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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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호 집필자 소개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와 어린이 프로그램의 원고를 썼고 만화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에릭 칼의 그림책에 반해서 어린이책 작가가 되었다.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아 이 방면의 책을 ..펼쳐보기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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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로 배우는 근대 이야기 | 저자신연호 | cp명주니어김영사 도서 소개

근대 문화재를 통해 근대의 역사적 사건을 살펴보면서 힘든 시절을 당당히 헤쳐 온 우리 민족의 힘을 느껴 볼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개화파 쳥년들의 운동부터 통일을 위해..펼쳐보기

 

 

 

 

 

서울역사


요약 테이블
문화재 사적 제284호

요약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에 있는 철도 역사. 1922년 6월 기공되어 1925년 9월 완공되었다. 건축사적으로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철도 역사이다. 벽돌·철골·철근·콘크리트가 주재료이며 벽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바닥은 콘크리트 슬라브, 지붕은 천연 슬레이트와 동판 이음으로 되어 있으며, 르네상스식에 비잔틴 풍 돔을 올린 절충주의 양식 건물이다. 한국 철도의 중심역으로, 1960년대와 1980년대 대규모의 보수공사를 통해 증축, 보완되며 여객 전용 역사로 사용되었으나, 2004년 KTX의 개통과 함께 새로 민자역사가 건축되면서 문화공간으로 용도가 바뀌었다.

서울특별시 중구 봉래동에 있는 철도유적. 사적 제284호. 총면적 26만 9,095㎡의 대지에 약 1만 7,200㎡ 규모로 지하 1층, 지상 2층으로 지은 건물이다. 서울(경성) 역사는 원래 목조가건물이었으나 1922년 6월에 일본인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의 설계로 총독부 철도국의 주관 아래 38개월 후인 1925년 9월에 완공되었다. 건물 재료는 벽돌·철골·철근·콘크리트 등을 사용했으며 벽은 벽돌과 화강석으로, 바닥은 콘크리트 슬라브, 지붕은 천연 슬레이트와 동판 이음으로 되어 있다.

서울역

서울역 전경, 사적 제284호, 서울 중구 봉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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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철도 역사는 1900년 인천역사, 1910년 부산역사, 1912년 신의주역사 등이 건축되면서 시작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세워졌던 국적 불명의 많은 건물들과 같이 서울역사의 건물양식도 르네상스식에 비잔틴풍의 돔을 올린 절충주의 양식으로 18세기 이래 서양에서 유행했던 양식을 모방했다. 총공사비는 1925년 당시 94만 5,000원이 들었는데 경비가 부족하여 원래의 설계보다 축소하여 지었다. 건물 안의 귀빈실 마루바닥은 모두 박달나무로 깔았고 2층에는 양식당을 운영했는데, 당시로서는 가장 세련된 서양식 레스토랑이었다.

해방 후 '경성역'이라는 이름이 '서울역'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역사의 일부가 파괴되었으나 원형에 맞추어 복원되었다. 수도 서울의 급속한 발전으로 수송량이 늘어나면서 1960년대에 남부·서부 역사를 신축했고, 1968년에는 수색에 차량기지를 세워 객차의 원활한 편성을 도모했으며, 1971년에는 화물의 취급을 용산역으로 이관하고 여객운송 중심역으로 개편했다. 이후 서울역사는 수도 서울의 급격한 발전과 함께 늘어나는 수송량을 감당하기 위하여 1960년대에 남부, 서부 역사를 신설, 본역사와 구분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1982~83년에는 역사 전반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하고 새마을호 대합실, 무궁화호·통일호 매표소와 대합실 및 각종 편의시설을 갖추고 여객전용 역사로 사용했다. 2004년 1월 고속철도인 KTX가 개통되면서 기존 서울역사 남쪽에 새로운 민자역사가 신축되었고, 구 역사는 폐쇄되었다. 이후 2011년 원형 복원공사를 마친 후, 복합문화공간 문화역서울 284라는 명칭으로 재탄생했다. 이후 서울역사 1층 중앙홀은 공연·전시·이벤트·카페 등을 위한 공간으로, 2층은 공연·전시·세미나·회의 등을 위한 다목적 홀로 이용되고 있다. 건물 자체는 건축사적으로 한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철도 역사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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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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