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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평/하면] 신록의 길을 지나 만나는 천년고찰의 멋, 운악산 현등사

by 무던 2014. 2. 21.

천년고찰, 오르는 길의 수려한 경관의 어울림,

'운악산 현등사(雲岳山 懸燈寺)'

경기도 가평군 하면 하판리 산163 / 031-585-0707

 

누군가에게는 깊은 믿음이고,

누군가에게는 풍경 좋은 절집입니다.

명산 고찰의 넋을 고이 간직한

경기도 3대 기도도량,

현등사를 다녀왔습니다.

 

 

 

 

 

 

부처님 오신날을 일주일 앞둔 주말,

가까운 곳으로 나들이 계획을 잡았습니다. 오랜만에 경춘가도를 달리고 싶은 마음에 남한강을 따라 달려 봅니다. 옛 그리운 이름들이 눈가에 스치며 흑백의 필름처럼 스쳐 지납니다. 청평, 가평, 남이섬, 홍천, 대성리... 다시 되새기고 나니 그리움이 가득 묻은 풍경들입니다. 젊음의 시간들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이름들 사이를 지나며 부드럽게 휘어진 국도를 따릅니다. 코구멍의 들숨은 지난날의 그리움이고 목구멍으로 뱉는 날숨은 지금의 삶에 대한 반성입니다. 그리움과 찰라가 서로 악다구니를 벌이고 나면 어느 순간 스스로의 삶에 대한 내일을 준비하게 됩니다.

기분 좋은 들숨과 날숨입니다  

 

 

운악산

운악산만경대는 금강산을 노래하고,

현등사 범종소리 솔바람에 날리는데,

백년소 무우폭포에 푸른안개 오르네.

 

 

 

지난날의 풍경은 아름답게 고이 접어 가슴에 묻고 다시 집으로 돌아 섭니다. 이번에는 지나온 길에서 벗어나 예전 자주 지나던 국도로 접어듭니다.

아주 먼 기억 속에 자리한 작은 절집으로 경기도 악산중의 한곳인 운악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한 고찰, 현등사를 찾아 갑니다.

 

 

신록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운악산

현재 현등사 진입로에서는 문화재관람료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1600원의 문화재관람료가 있었는데요. 삼층석탑의 진신사리를 도난 당한 이후 입장료를 폐지하였다고 합니다. 성종1년(1470년) 세종대왕의 8남인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가 진신사리를 봉안하였는데, 1979년에 도난당하였던 것을 삼성문화재단에서 매입, 취득을 하게 되었고, 이는 다시 2006년에 현등사로 모셔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운악산(雲岳山)’은 경기도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해발 935m의 산으로 경기도 포천과 가평을 경계로 서 있습니다.

사시사철의 풍광이 아름다우며, 그 중에서도 가을 단풍과 겨울 설경이 금강산만큼이나 아름다운 곳이라 합니다. 명산의 품격을 지닌 운악산의 7할 중턱에는 천년고찰이 자리 잡고 있으니 현등사입니다. 조금 힘만 더 쓴다면 정상까지도 돌아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절집은 보살님들보다 등산객들의 쉼터로 더 많은 분들이 찾고 있는 곳입니다  

 

 

 

삼충단(三忠壇)

현등사 오르는 길목에 자리한 제단으로,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체결로 자결을 택한 충신 3인(조병세, 최익현, 민영환)의 충절을 기리는 제단입니다.

'산재 조병세(山齋 趙秉世, 1827~1905)'선생은 당시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경기도 가평에 머물다가 을사조약의 모효와 조약에 서명한 오적을 처단하고 국권을 회복해야는 상소를 올렸으나 왜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결고국중사민서(決告國中士民書)'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으며,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선생은 을미의병운동의 선봉장으로 조약체결에 다시 의병을 봉기하여 왜구와 싸웠으며, '청토오적소(請討五賊疏)'의 상소를 올렸으나 체포되어 대마도로 이송 되자, 단식으로 항거하다가 끝내 순국하게 됩니다.

'계정 민영환(桂庭 閔泳煥, 1861~1905)'선생은 당시 시종무관(侍從武官)으로 조약을 듣고 대한문 앞에서 조병세선생과 함께 석고대죄하며 국권회복의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각국의 공사에 자신의 유서를 보내고 자결을 하였습니다. 

 

 

 

 

현등사(懸燈寺)’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 봉선사의 말사로 경기도에 자리한 강화 보문사, 관악산 연주암과 함께 경기 3대 기도도량중의 한 곳으로 한북제일의 지장도량으로 꼽힙니다.

현등사는 한반도에 불교의 시작을 알렸던 신라 법흥왕14(527)에 불교를 공인한지 13년뒤 법흥왕27(540)에 세워진 천년고찰입니다. 인도의 고승 마라아미(麻羅阿彌)’가 신라에 들어 와서 불법을 전파하니 왕은 그를 가상히 여겨 운악산에 운악산사(雲岳山寺)’를 짓고 포교에 힘쓰도록 한 것이 현등사의 시작입니다.

이 후 효공왕2(898),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가 고려의 도읍을 송악산 아래로 정하고 세곳에 약사도량을 세웠는데 동쪽의 기운이 약하여 이를 보완하고자 여러 곳을 다니다가 산세의 빼어남이 좋은 운악산에 이르러 절을 세우려 하니 이미 절터가 남아 있음을 보고 그 자리에 절집을 세우면서 운악산사의 첫 중창이 됩니다  

 

 

 

현등사 일주문

 

 

현등사라는 이름은 고려 희종6(1210)에 들어서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에 의해서입니다.

지눌이 망일산 원통암(望日山 圓通庵)’에 머물 때 운악산을 바라보니 삼일동안이나 빛을 발하고 있어 그곳을 찾아가니 관음전이 서 있었으며 그 옆 서쪽 바위 위에는 옥등(玉燈)’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전각을 수습하여 세우면서 옥등이 걸려 있는 절집이라는 뜻의 현등사(懸燈寺)’라 부르게 됩니다.

참고로 불가에서의 ()’이란,

어둠을 밝히는 것과 함께 부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으로 전지전등(全智傳燈)’이라 하여 만물에 통달하여 막힘이 없는 지혜를 서로 주고받는다.’는 뜻이 됩니다.

 

조선에 들어서는 태종11(1411) 함허대사(涵虛大師, 1376~1433)’가 중창하는 등 현등사에는 명망 있는 고승들이 찾아 수행정진 하던 절집입니다.

그러던 순조23(1823)에 관음전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고, 다시 중창하여 번성하였습니다.

그렇게 1500여년을 이어온 현등사는 1950년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현재의 절집은 1961년부터 중창을 시작하여 세운 전각들입니다. 지금도 현등사는 중창불사에 한창입니다. 단청도 마무리 짓지 못한 전각들이 좁은 산비탈의 경사에 아슬하게 선 모습들입니다.

 

옛 천년고찰의 풍모는 사라졌으나 명산과 어울린 명찰의 모습으로 거듭나기 위한 중창이 계속되고 있는 현등사입니다. 

 

 

 

 

 

 

 

현등사를 찾아가는 재미는 무엇보다도 절집을 오르는 길입니다.

'백년폭포''무우폭포'의 시원스러운 풍경을 만나고 '민영환암각바위'의 지나 깊게 구부러진 신록의 길을 오르다 보면 만나는 절집이고, 계속해서 절집의 뒤로는 눈썹바위, 치마바위, 거북바위, 만경대등의 풍광이 병풍을 이루고 있는 곳이지요.

 

힘겹게 절집에 닿으면 이마의 땀방울이 채 마르기도 전에 불이문백팔계단을 만납니다.

다시 한번 힘겨운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서면 차를 마시며 쉴 수 있는 운악산방이며 그 옆으로 지진탑을 지나 오르면 절집의 경내입니다.

가람들은 대부분 남동향하고 섭니다.

보광전이 자리하고 옆으로 지장전 뒤로 극락전, 삼성각, 나한전, 만월보전이 차례로 서며 그 뒤로 자연 계단위로 우리나라 최초라 하는 적멸보궁이 자리합니다.           

 

 

 

무우폭포(舞雩瀑布)

 

 

 

  민영환 암각서(閔泳煥 岩刻書)

현등사 오르는 길에 자리한 거대한 바위위로 흐르는 폭포입니다. 약 35도 정도 기울어진 바위로 아래에는 작은 소를 이루고 있습니다.

바위 상부에는 구한말 시종무관 민영환이 기울어 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하늘을 보고 탄식하였다는 곳으로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민영환바위로 부르고 있습니다.  

을사조약으로 자결하여 충신으로 알려지며 1962년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지요. 그러나 그 이전, 명성황후 민씨의 집권으로 조정이 민씨일파에 의해 좌지우지 될때의 세력으로 매관매직, 삼정의 문란을 일으킨 척족세력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1895년 민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 면서 친러파가 축출되고 친일적 경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낙향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현등사 불이문

 

현등사 백팔계단

현등사 백팔계단은 2005년 일주문과 함께 조성 되었습니다.

108계단은 108번뇌를 뜻하는 것으로 6근根(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으로 6진塵(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燭, 법法)을 대하니 제각각 호好(좋다), 오惡(나쁘다), 평등平等(좋지도 나쁘지도 않다)의 세가지가 부딪히며 18번뇌를 일으키고,

고苦(괴롭다), 락樂(즐겁다), 사捨(버리다)의 삼수가 18번뇌를 일으켜 36번뇌가 되고,

이는 다시 전생前生(과거), 금생今生(현재), 내생來生(미래)에 배하여 108번뇌가 된다합니다.

 

 

 

 

  현등사 지진탑(地鎭塔, 도문화재자료 제17호)

높이 1.7m의 소형탑으로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현등사를 재건하면서 경내의 지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어 지진탑(地鎭塔)이라 합니다. 고려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석탑으로 전반적인 모습은 3층석탑의 모습으로 탑신의 사방에 부처님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현등사 삼층석탑(三層石塔, 도유형문화재 제63호)

조선 초기의 3층 석탑으로 높이가 3.7m 규모의 석탑입니다.

방형 3층석탑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으나, 고려시대의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기단형식과 표면에 장식된 문양의 양식적 특징 등으로 보아 조선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1470년(세조 15) 현등사를 중수한 기록이 새겨진 사리용기가 발견된 바가 있어 15세기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현등사 보광전(普光殿)

정면5칸, 측면6칸의 팔자지붕의 전물로 'ㄷ'자형의 평면을 가진 독특한 구조입니다. 건물의 앞 뒤로 보광전(普光殿) ,관음전(觀音殿),  보합태화루(保合太和樓), 운악산 현등사(雲岳山 懸燈寺), 대자대비전(大子大悲殿)등의 편액 6개가 걸려 있기도 합니다.

1987년에 신축한 건물로 불당이라는 개념보다는 요사의 성격이 있는 건물입니다.

 

보광전 우측에 걸려 있는 목탁

현등사 목탁새가 매년 5월 부처님 오신날 즈음에 찿아와 목탁속에 둥지를 틀고 아기새를 키워 나간다 합니다.

2003년 5월 15일 SBS' 세상에 이런일이'에 방송이 되었다고 합니다. 

 

 

현등사 '극락전(極樂殿)'

현등사의 본당으로 정면3칸, 측면3칸의 팔작지붕으로 영조22년(1746년)에 조성되었습니다.

가구식 기단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그 위에 자연목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띠살문 창호의 문을 달았습니다.

  

현등사 '삼성각(三聖閣, 도문화재자료 제125호)'

현재의 삼성각은 옛 산신각의 지리에 신축한 건물로 정면3칸, 측면1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입니다. 기도도량으로 많은 영험을 가진 현등사의 전각중에 이곳 삼성각의 기도효험이 영험하다고 소문이 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지장전 앞 연등 

 

 

 

중창중인 만월보전과 영산보전(나한전) 

 

적멸보궁 가는 길

 

현등사 '적멸보궁(寂滅寶宮)'

현등사의 가장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건물로 정면, 측면1칸의 건물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적멸보궁으로 알려져 있으며 경기3대기도처(강화 보문사, 관악산 연주암)의 한곳으로 그 중 으뜸이라 합니다. 

 

적멸보궁 기둥의 세호

보통은 왕릉과 같은 능역에 설치되는 망주석에 자리하는 세호가 적멸보궁의 기둥에 자리하고 있음에 이채롭기도 하며,

보통은 양쪽 기둥에 한쪽은 오르고, 한쪽은 내려오는 형상을 꾸미게 되어 있는데, 이 기둥에는 한쪽 기둥에 오르고 내리는 두마리의 다람쥐가 함께 마주 보고 있습니다.

 

 

 

 

 

글,사진  자유여행가 박성환

www.gilson.asia

출처 : 길손의 旅行自由
글쓴이 : 길손旅客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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