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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악산 현등사

by 무던 2014. 3. 17.

 

현등사는 가평군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찰로서, 신라 제23대 법흥왕 때 인도에서 온 마라 아미 스님을 위하여 창건한 것이라 한다.

그 후 수백년동안 폐허로 버려져 오다가 고려제21대 희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운악산 중턱에서 불빛이 비치는 곳을 찾아가니 석대 위에 옥등 이 달려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 절을 중건하고 현등사라 했다.

 

 그 뒤 조선 태종 11년(1411)  함허대사가 중수했고, 순조 29년(1829) 화재를 만나 건물이 전소된 것을 이듬해  최윤 원빈스님이 보광전, 극락전, 요사등 건물을 중수, 1984년 충현 스님이 극락전, 보광전 등을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경내에는 현재 3층석탑, 지진탑(보조국사사리탑), 화담당경화탑, 함 허대사 부도, 북악 부도등의 문화재와 사찰 건물내에는 아미타불 좌불상, 후불탱화, 동종 등 전래의 유물들이 보존되고 있다.

 

또한 무우폭포, 백연폭포, 궁소, 눈썹바위, 치마바위, 거북바위등 자연의 절경이 많아 명승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주차장에서 절로 오르는 약 2km 의 구간과 현등사 주변으로는 단풍나무, 고로쇠나무, 다래,산철쭉, 산진달래, 소나무 등이 우거져
           있다.

 

2014년 3월16일 일요일.

주차장에서 현등사 절을 왕복 2시간정도로 쉬엄쉬엄 산책.

 

백년폭포.

숫자 100이 아니고 끝없이 오랜세월 끝없이 흐른다고해서 지어진 이름이라고

 

 

 

갈수기라서 폭포의 모습이 아쉽기만하다.

 

 

민영환바위

민영환이름을 새긴곳에 솔잎이 떨어져 있어서 더 선명하게...

 

 

108개단 올라가는곳.현등사절로 가는

불이문

 

 

 

 

 

 

나는 누구인가.

보광전

 


이 절은 그 후 몇 차례 더 소실되고 재건되기를 거듭한다. 현재의 건물 중 다 스러져 가는 산신각이나 18세기에 세웠다는 극락전을 제외하면 별반 오래된 건물은 없다. 이처럼 운악사는 그 이름에 비해 절 건물이 화려하지 않다.
6.25전쟁 때도 화를 입었으니 고색창연한 옛스러움은 느끼기 어렵다.주의를 압도하지 않는 절 건물은 오히려 자연과 어울린 소박함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이것이 가평의 역사를 더욱 잘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가평읍에 있는 '한국 전쟁 참전기념비' 가 보여 주듯 현등사도 현대사의 상처를 비껴갈 수 없었던 것이다. 자랑할 만한 역사의 흔적이란 화려함에서 오지 않음을 현등사에서 느낄 수 있다. 경내로 들어서기 전에 보이는 단으로 쌓은 돌 추대는 이것의 연원이 얼마인가를 따지기 전에 우선 편안함을 준다.오랫동안 잊고 살다 우연히 찾은 옛 물건을 대할 때의 느낌 같은 것이다. 이런 느낌을 주는 것들이 경내에는 여럿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된 석탑과 함허 대사 부도탑, 지진탑(地震塔)등이 그것이다.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탑은 원래는 5층탑 이었는데, 현재는 2층의 몸 돌과 지붕 돌이 없어져 4층으로 보다. 탑 전체의 아래쪽에 온갖 문양으로 장식된 부분이 기단부이고 이와 포개 놓은 듯한,문양 없이 외곽선만으로 감실 형태를 만든 부분부터가 탑신 곧1층 몸 돌이다. 현재의 형태 중 1층 지붕 돌 과 2층 지붕 돌 차이가 큰 것은 원래의 2층이 없어졌기 때문이라 추측해도 된다.
지붕 돌을 들여다보면 네 귀를 치켜들었는데 이는 고려 말쯤에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갑것의 문양들도 조선 공예품에서 나타나는 문양들이 많다.이를 증명하듯 탑 속에서 나온 사리용기의 기록은 탑의 조성 연대가 성종 1년(1470)이라고 밝히고 있다.





 
 

한편 석탑 아래쪽 돌축대 모서리에는 또 다른 탑이 하나 있다. 이 탑 역시 1층 몸들을 잃어버려 온전한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원래는 3층탑 이었는데 서 있는 위치부터가 여느 탑의 위치하고는 다르다. 보조국사가 이 절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 풍수지리 설을 토대로 했듯이 이 탑은 그 이름부터가 땅 기운을 누르기 위한 지진 탑이다.

현등사의 기원이 신라 법흥왕 때로 그 당시에 이미 신라가 북한강 유역까지 점령했을까 되묻게 했듯이, 지진 탑에서 불교와 풍수지리의 뒤섞임을 엿보게 하는 역사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함허 대사의 부도 역시 소박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함허의 부도는 강화도 정수사에도 있는데, 여기의 함허 대사 부도는 함허와 관련된 주창 설화 때문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다. 조선 태종 11년(1411)에 함허 기화가 삼각산에서 오신산으로 가다가 이 부근에서 길을 잃었는데, 갑자기 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하므로 따라가 보았더니 사슴은 간 데 없고 그곳에 옛 전각지가 있었으므로 절을 크게 중창했다는 얘기이다

 
 


신라 법흥왕 때 건조한 탑으로 높이 3.7 m 자연 석반을 지대석으로 하고,그위4각 하대석과 낮은 상태중석 다시 두터운 상대 갑석으로 기단부를 이루고 있으며 아무런 조각이 없는 4각옥신위에 1층 옥개석은 상대갑 보다 넓으나 2층부터는 옥과 옥개석의 차이가 차차 적어졌으며 각옥 개석은 귀가 들리고 곡율이 큰 것이 특징이다이 탑은 방형< 方形 >의 지대석< 地臺石 > 위에 단층기단< 單層基壇 >을 놓고 그 위에 탑신부< 塔身部 >와 상륜부< 相輪部 >를 형성한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부에는 종·횡선문< 縱·橫線紋 >과 연주문< 聯珠紋 >, 연화문< 蓮華紋 > 등의 조식< 彫飾 >이 있다. 탑신부에는 상하층 감축이 있어 안정감이 있으며 옥개석받침돌이 낮은 편이어서 주목된다.

상륜부는 화문< 花紋 >과 연주문< 聯珠紋 >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기단부와 탑신부 각부의 양식수법< 樣式手法 >으로 보아 고려< 高麗 > 말기< 末期 >에 속하는 석탑이다.


 
 


이탑은 화담 박경화(1786-1848) 의 부도탑으로 서기 1848년에 세운 것으로 이부도탑의 주인공이 화담당은 1803년에 화양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고 지탁 대사의 법을 이어 받았다. 그후 강원도 보계산 석대암에서 화엄경 .열반경 등을 연구하고 전국각지의 사찰을 순회 하며 67품의 계송을 퍼다가 만년에 이곳 현등사에 들어가 수도에 전념 하였다.

 
  또한 본탑은 운악산이 음기가 서려있는 산으로 매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고 앙기를 보강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루려한 선인들의 지혜도 되새기게됨
 
 


현등사 경내의 언덕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데, 본래 부터 이 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기단부 및 1층 탑 신석이 없어져 원형을 잃고 있다. 가장 하단에 있는 지대석에는 2단의 괴임대가 마련되었고, 네 귀퉁이의 합각<合角>이 뚜렷 하다.
기단의 갑석<甲石>은 2매의 판석으로 아래쪽에 부연<副椽>과 위쪽에 각형 2단 받침을 조성하였고 네 위퉁이의 합각선이 뚜렷하다. 탑신석 <塔身石>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었다.

탑신석에는 각각 양 우주<隅柱>가, 옥개석의 하단에는 옥개 받침이 있고, 2층이 4단, 3층이 3단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수가 줄어드는 형식을 보인다. 낙수면의 경사가 비교적 완만하고, 추녀는 수평으로 흐르다 끝에서 급하게 반전<反轉>되었다.

 
 

각 층 옥개석의 위에는 탑신을 받기 위한 각형 1단의 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석<露盤石>(탑의 최상부 옥개석 위에 놓아 복발·보주 등의 상륜부재를 받치는 장식)만이 남아 있는데, 지름 5㎝의 찰주공<擦柱孔>(탑의 가장 꼭대기에 장식하는 기둥인 찰주를 세우기 위한 구멍)이 있다. 이 석탑을 지진탑이라 일컫는 것은 이 곳의 지기<地氣>를 진압하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현등사 삼층석탑

 

 

 

 

삼성각

 

 

 

 

만월보전.영산보전

 

 

 

적멸보궁.

다른곳의 적멸보궁과 달라보여 의아했다.

 

 

 

 

 

현등사 삼층지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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