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한화콘도에서 친구들과 1박후 다녀온 용문사
2014년 11월15-16일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는
키 39.2m로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가장 키가 크며, 뿌리 부분 둘레만 해도 15.2m나 된다. 나이는 약 1,100년으로, 신라 신덕왕 2년(913)에 대경대사가 용문사를 창건한 후 얼마되지 않아 심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나라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큰소리로 울어 위험을 미리 알렸다고 하는데,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이 승하했을 때는 가지 한 개가 부러졌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이런 용문사 은행나무를 소중히 여겨 조선 세종 때 당상관(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망국의 한을 품고 떠난 마의태자”
마의태자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로, 신라가 고려 왕건에 대항할 길이 없어 군신회의를 열고 항복을 논의할 때 신라 천년사직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 없다고 말하며 항복에 반대하였다. 결국 고려에 항복 문서가 전달되자 마의태자는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베옷을 입고 초근목피로 여생을 마쳤다고 한다.
용문사 은행나무는 마의태자가 궁을 떠나 개골산으로 가던 중 용문사에 들렀을 때 심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15.2m이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 있어서 최고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줄기 아래에 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외에도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 정미의병(1907)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소리를 내어 알렸다고도 한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당상관(정3품)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져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 한다.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세종 29년(1447) 수양대군이 모후 소헌왕후 심씨를 위하여 보전을 다시 지었고 세조 3년(1457) 왕명으로 중수하였다. 성종 11년(1480) 처안스님이 중수한 뒤 고종 30년(1893) 봉성 대사가 중창하였으나, 순종원년(1907) 의병의 근거지로 사용되자 일본군이 불태웠다. 1909년 취운스님이 큰방을 중건한 뒤 1938년 태욱스님이 대웅전, 어실각, 노전, 칠성각, 기념각, 요사등을 중건하였으며, 1982년부터 지금까지 대웅전, 삼성각, 범종각, 지장전, 관음전, 요사채, 일주문, 다원 등을 새로 중건하고 불사리탑, 미륵불을 조성하였다. 경내에는 권근이 지은 보물 제531호 정지국사부도 및 비와 지방유형문화재 제172호 금동관음보살좌상, 천연기념물 제 30호 은행나무가 있다. |
노란은행잎이 아쉬워서 펌....
'서울.경기.인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미꾸미 조각공원2 (0) | 2014.11.23 |
---|---|
모도와 이일호/모도조각공원1 (0) | 2014.11.23 |
가평 유명산 /862미터 (0) | 2014.11.01 |
양평 몽실식당 (0) | 2014.11.01 |
유명산 단풍 (0) | 2014.11.0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