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사는
1291년(고려 충렬왕 17년) 합단적 침입과 1592년(조선 선조 25년) 왜적 침략에 맞서 국권수호를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국선열의 숭고한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으로
원충갑,
김제갑,
원호 등 3위를 배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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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한 사람2015년 7월 23일 이후 추천 목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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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한 사람
2015년 7월 23일 이후 추천 목록입니다.원호(元昊) 1397∼1463
조선 단종(端宗)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원주(原州), 자(子)는 자허(子虛), 호(號)는 관란(觀瀾)·무항(霧巷)이다. 아버지는 별장(別將) 원헌(元憲)이며, 어머니는 국자감(國子監) 진사(進士) 원천상(元天常)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글공부를 좋아하여 15세를 넘어서는 사서삼경(四書三經)에 통달하고 도학군자(道學君子)라는 칭호를 들었다. 1423년(세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학자로 인정받아 성삼문(成三問)·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각종 편찬사업에 참여했으며, 여러 청관(淸官) 현직(顯職)을 지내고, 문종(文宗) 때 집현전(集賢殿)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의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잡자 낙향하였고,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 사육신(死六臣)을 비롯한 관련자들이 죽고 단종(端宗)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 청령포로 유배되자, 원호는 단종을 가까이 모시기 위해 청령포 서쪽 상류인 사내평에 관란재(觀瀾齋)를 짓고 아침저녁으로 단종이 있는 쪽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며 사모하였다. 1457년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단종이 영월 관풍헌에서 죽게되어서는 백덕산(白德山)에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상(三年喪)을 치르고 원주 무항동(霧巷洞)에 돌아와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권침(權琛)과 함께 농민을 위해 월계도(月計圖)를 만들어 일년 농사의 풍흉(豊凶)을 점쳐 볼 수 있게 하였다. 원호는 관복(官服) 입은 사람을 평생동안 대하지도 않았고, 더욱이 세조가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끝까지 왕명을 따르지 않았는데, 이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굳은 절개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앉을 때와 누울 때는 반드시 동쪽을 향하여 앉고 머리를 두었으니 단종의 능(陵)이 자기 집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1699년(숙종 25) 판부사(判府事)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원주에 정려각(旌閭閣)이 세워졌고, 1703년(숙종 29) 칠봉서원(七峰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1782년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성담수(成聃壽)와 함께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묘소는 원주시 판부면 서곡리 내남송에 있다.
원충갑(元沖甲) 1250∼1321
고려의 무신(武臣)으로, 본관은 원주(原州)이다. 원주사람으로 체구는 작으나 정력이 넘쳐 날쌔었고 눈동자가 번개처럼 빛났으며, 위험한 지경에 있으면서도 자기 한 몸을 돌보지 않았다. 향공진사(鄕貢進士)로 원주별초(原州別抄)에 있으면서 1291년(충렬왕 17) 합단적(哈丹賊)이 치악성(雉岳城)을 포위하자, 전후 10차에 걸쳐 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때 결사대 중산(仲山), 방호별감(防護別監) 복규(卜奎), 흥원창판관(興元倉判官) 조신(曺愼), 별장(別將) 강백송(康栢松), 원주(原州) 아전(衙前) 원현(元玄) 등 다수의 사람과 힘을 합쳐 물리쳤다. 이로부터 합단적은 예봉(銳鋒)이 꺾이어 감히 공격도 노략질도 하지 못하였고 여러 고을에서도 굳게 방어하게 되어 비로소 합단적을 경시하는 마음이 생겼으니, 이는 모두 원충갑에게서 얻은 힘이었다. 원충갑의 이러한 공로로 원주는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로, 다시 1308년 원주목(原州牧)으로 승격되었고, 원주에 부과되던 각종 부역(賦役)과 잡공(雜貢)이 3년 동안 면제되었다. 원충갑 또한 여섯 번 전임(轉任)하여 삼사(三司) 우윤(右尹)에 올랐다. 충선왕(忠宣王) 때 응양군(鷹揚軍) 상호군(上護軍)이 되었고, 합단적을 물리친 공으로 1319년(충숙왕 6) 추성분용정란광국공신(推誠奮勇定亂匡國功臣)이 되었다.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다. 치악산 영원산성 안에 원충갑사(元 甲祠)가 세워져 제사를 모시다가 1669년(현종 10) 사당을 세워 원충갑을 주향(主享)하고 김제갑(金悌甲)과 원호(元豪)를 배향(配享)하였고, 1670년(현종 11) 윤2월 7일 충렬사(忠烈祠)로 사액(賜額)되었다. 충렬사는 1871년 철거되어 사액 현판은 괴산 충민사로 옮겨졌다. 묘소는 원주시 지정면 간현리에 있다.
김제갑(金悌甲) 1525∼1592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순초(順初), 호(號)는 의재(毅齋)이다. 고려의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進士) 김석(金錫)이고,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병조좌랑(兵曹佐郞)·정언(正言)을 거쳐 1581년(선조 14)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고, 1583년 우승지(右承旨)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있다가 왜장(倭將) 삼길성(森吉成)이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 오자 가족과 고을 백성을 이끌고 영원산성( 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어 부인 이씨(李氏)와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충절을 기려 1592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경연(經筵)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성균관(成均館) 춘추관사(春秋館事)에 추증(追贈)하였다. 원주의 충렬사(忠烈祠)와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711년(숙종 37)에 '문숙(文肅)'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서는 원주역전에 그를 추모하는 충렬탑(忠烈塔)을 세웠고, 이곳에는 1670년에 세워진 충렬비(忠烈碑)가 남아있다. 김제갑 목사의 충렬비에 기록된 명문(銘文)에는,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어야 할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오직 군자라야만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이다. 위급함을 당하여도 평소와 같이 보고 충성심과 분개심을 가다듬어 끝과 시작이 다르지 않았도다. 신하는 충성으로 죽고, 부인은 죽어 정절을 지켰으며, 아들은 죽어 효도를 다하였으니 여기 만고(萬古)에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을 남겼도다. 치악산(雉岳山)이 동쪽에 우뚝 솟고 봉천(鳳川)은 서쪽으로 흐르니 선생의 이름과 함께 길이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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