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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다낭·블라디보스톡

신한촌 기념비/블라디보스톡

by 무던 2019. 8. 9.

 

신한촌 기념비 


신한촌은 1863년 이후 연해 지방에 들어온 한인들이 라게르 산 비탈지 부근에 모여 살면서 건설되었다.

디나모 스타디움 부근의 구한촌과 함께, 1937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 일대 한인들의 양대 거주 지역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국내외 애국지사들이 이곳에 결집하여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였으며,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국민의회)를 수립했다.

소련혁명 직후,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점령하고 있을 당시, 신한촌에는 비밀아지트와 빨치산 부대의 무기창고들이 있었다.


 신한촌에서 몇 명의 일본군이 살해되자 일본군은 다수의 한인들을 루고바야 광장에서 총살했다.

소비에트 시절에는 현대식 건물과 문화회관이 세워졌으며, 1932년에 한국극장이 개관되는 등 한인 거주 지역으로서 체계를 갖추어 갔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에 의해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면서 신한촌은 해체되었다.

1999년 8월 15일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한민족연구소가 ‘신한촌 기념비’를 건립했다. 이 기념비는 연해 지방 일대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기리고 재러시아 한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신한촌


       



시대 근대
성격 집단거주지, 독립운동기지
유형 지명
소재지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분야 역사/근대사

요약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에 자리잡고 있던 한인집단 거주지.

                                 

    개설

    일명 신개척리(新開拓里)라고도 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는 국외독립운동의 중추기지 구실을 하였다.

    형성 및 변천

    블라디보스토크에는 1870년대부터 한인이 점차 집중하기 시작해 1886년에 400명, 1891년에는 840여 명에 이르렀다. 한인 인구가 늘어가자, 시 당국에서는 1893년 한인들만 집단으로 거주하도록 하는 구역을 설정하였다.

    ‘카레이 스카야슬라보드카(한인촌)’ 혹은 ‘개척리’라 부르던 이 지역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신한촌 성립 이전 한인집단 거주지로 비교적 시내 중심지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1911년 러시아당국은 페스트 창궐을 기화로 위생실행위원회 결의를 거쳐 개척리를 강제로 철거시켜 이 일대를 기병대 숙소로 삼았다. 그리고 한편, 5월 28일까지 시 서북편 외곽에 새로 설정된 구역으로 이주하도록 강제 조처하였다. 이곳은 구개척리로부터 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산비탈로 높고 건조하며 아무르만을 굽어보는 경치 좋은 곳이었다.

    동서 약 6정(丁), 남북 약 7정 규모의 비교적 넓은 면적이었다. 이 지대의 토질은 자갈은 섞였으나 대체로 잡초가 무성하고, 중국인들은 밭에 무·파 등 채소를 심었다. 한인들은 그 곳에서 다시 피땀을 흘려 신개척리를 건설, 새로운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의미로 ‘신한촌’이라 명명하였다.

    도로는 4∼5칸 정도의 너비로 아무르만을 따라 아래에서 위로 차례대로 스보로프스카야·아무르스카야·하바로프스카야·메리코브스카야·체리 파노프스카야 등 5개의 간선거리를 만들고, 동서로도 넓고 좁은 골목길을 만들었다.

    가옥은 호당 건평이 대개 12∼13평에 불과한 소형의 목조였으며, 너비 세 칸 반, 길이 네 칸 정도의 러시아풍으로 양철지붕에 유리창을 내었다. 옥내 한쪽은 헛간을 두어 부엌으로 쓰고 솥과 옹기를 두었다. 난방은 전부 온돌구조였다.

    가옥 신축에 동원된 목공·석공은 한인이 70%, 중국인이 30%였다. 1911년 5월 31일 현재 겨우 50호 정도 신축가옥이 들어섰고, 8월 현재 313호가 있었다. 그 해 초여름까지 이곳으로 이주한 한인은 1,500명 정도였고, 그 뒤 1915년에는 신한촌의 한인수는 약 1만 명에 달하였다.

    서북간도 및 연해주 한인사회를 배경으로 건설된 신한촌은 항일민족지사들의 집결지였고, 나아가 국외독립운동의 중추기지로 발전해서, 한민족의 의기가 충천하게 되었다. 이곳으로 망명, 활동했던 인물로는 이범윤(李範允)·홍범도(洪範圖)·유인석(柳麟錫)·이진룡(李鎭龍) 등의 의병장을 필두로 하여 그동안 국내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인물들이 망라되었다.

    헤이그 특사인 이상설(李相卨)·이위종(李瑋鍾)을 비롯, 북간도 용정촌(龍井村)과 서간도 삼원포(三源浦)에서 민족주의교육을 실시하던 이동녕(李東寧)·정순만(鄭淳萬), 미주에서 공립협회(共立協會)와 국민회를 조직·활동하던 정재관(鄭在寬)·이강(李剛)·김성무(金成茂) 등이 이곳에 일차 집결하였다.

    또한, 국내에서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활동하던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해 이종호(李鍾浩)· 이갑(李甲)·조성환(曺成煥)·유동열(柳東說) 등도 이곳으로 집결하였다.

    그 밖에도 민족주의사학자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도 합세했으며, 기독교계의 이동휘(李東輝)와 대종교의 백순(白純) 등을 비롯한 애국계몽운동자들도 연이어 집결하였다.

    이곳에 모인 항일민족운동가들은 그 곳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물들인 최재형(崔在亨)·최봉준(崔鳳俊)·문창범(文昌範)·김학만(金學萬) 등과 합력해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일제는 신한촌 외곽 약 1km 지점에 영사관을 두고 신한촌을 중심으로 한 이와 같은 항일민족운동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신한촌 내 설립단체

    신한촌에서의 1910년대 초기 한인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권업회(勸業會)의 항일민족운동이다.

    권업회는 신한촌 건설과 같은 시기인 1911년 5월에 조직되어 1914년 9월까지 3년여에 걸쳐 활동한 한인결사였다. 권업회는 조국독립을 위한 계몽활동과 민족주의 교육, 농상공업 등 실업 권장을 통해 한인사회의 정치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면서 독립전쟁론을 실현하는 것을 최고이념으로 삼았다.

    또한, 독립전쟁론을 구체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1914년신한촌에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 政府)도 조직하였다. 대한광복군정부는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각각 선출하고, 국외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대한광복군을 양성해, 강력한 항쟁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전시체제 확립에 따른 권업회 해체와 동시에 폐지되고 말았다.

    또한, 신한촌 중심지에는 한민학교(韓民學校)가 건립되어 민족주의 교육에 크게 공헌하였다. 원래는 개척리에 있던 계동학교(啓東學校)를 확대, 개편해 개교했으나, 1911년신한촌 건립과 동시에 이 곳으로 이전하였다.

    1912년 3월에는 2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양옥의 대형교사를 신축, 연해주 민족주의 교육의 본산이 되었다. 그리고 신한촌 외곽에는 조선사범대학·원동종합대학 등이 있어 한인 자제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한편, 신한촌 안에는 신한촌민회(新韓村民會)라는 자치기구가 결성되어 한인사회의 자치를 신장시켜 나갔다. 이 기구는 원래 블라디보스토크 거주 한인들을 모두 규합하고자 1911년 결성된 해삼위거류 민회(海蔘威居留民會)가 1912년 6월 발전적으로 해체되면서 탄생하였다.

    임원으로 회장 김병학(金秉學), 부회장 이동환(李東煥) 이하 20명의 평의원을 선출하였다. 특히 한민학교의 운영과 유지 문제, 신한촌 내에서의 한인의 권리 보호, 시당국과의 행정타협문제 등의 사안에 중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신한촌을 중심으로 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던 항일민족운동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러시아의 전시체제 확립으로 탄압을 받아 이후에는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북간도로 옮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1937년 극동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로 신한촌이 폐쇄될 때까지 신한촌에서의 한인 활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현황

    현재는 대규모 아파트 밀집지역으로 변모해 과거 한인의 거주 흔적은 찾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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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8.5일


    신한촌

    [ 겟어바웃_블라디보스톡 신한촌2 ]

    조선의 정치 불안과 빈곤으로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가 시작되었던 1863년 하산 지역 남쪽을 중심으로 최초의 한인촌이 생겨났습니다. 1870년대 8,400명으로 집계된 연해주 한인 이주민의 수가 1923년에는 12,000명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1929년 하산 지역 북부 포세에트 항구 한인 마을은 한인 극장과 문화회관은 물론, 한인자치기관을 두고 있었으며, 행정기관에서는 한글을 사용하는 등 한인 정착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1937년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강제 이주 명령에 의해 2차례에 걸친 연해주 한인 강제 이주가 집행되면서 현재 러시아, CIS 국가에 산재해 있던 고려인 동포들의 한과 설움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그간 한인촌은 일제 침략 때 항일운동에 크게 기여한 지역으로 많은 독립지사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1999년 8월 한민족연구소가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기리고, 러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신한촌에 기념비를 설립했습니다. 이에 ‘2002 한-러 친선 특급 시베리아철도 대장정’도 항일 독립운동사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신한촌 항일운동 기념비 앞에서 그 첫발을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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