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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5개국·발칸2개국

베를린장벽/독일

by 무던 2019. 6. 17.


독일 시가지 건물 벽화







베를린 장벽



요약 동베를린 및 동독의 기타 지역과 서베를린을 격리시키기 위하여 설치된 장벽(1961~89).

1949~61년 250만 명에 달하는 동독의 기술자·전문직업인·지식인들이 서독행을 택함으로써 동독의 경제력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그결과 동독 인민회의의 결정으로 1961년 8월 12일 밤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가능성을 봉쇄하기 위한 장벽이 설치되었다.


철조망과 블록으로 이루어진 장벽은 기관총 초소와 지뢰지역이 설치된 5m 높이의 콘크리트 장벽으로 대체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고압선과 방어진지들이 45㎞에 걸쳐 구축되어 베를린 시를 양분하고 서베를린 주위로도 120㎞의 장벽이 축조되었다.


베를린 장벽은 오랜 기간 동안 동·서 냉전의 상징물인 것처럼 인식되어왔다. 약 5,000명의 동독인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장벽을 가로지르는 데 성공했으나 다른 5,000여 명은 공산당국에 체포되고 말았으며, 191명의 동독인들이 장벽을 넘다가 발각되어 사살되었다. 1989년 10월 동유럽의 민주화로 동독의 강경보수 지도부가 해체되면서 11월 9일 서독과의 국경선이 개방되었고 장벽의 굳게 잠겨 있던 문도 활짝 열려 자유로운 상호방문이 가능해졌다.

28년간 독일을 동·서로 분단했던 정치장벽의 기능이 정지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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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통일과정

베를린 장벽의 붕괴


요약 테이블
발생1989년
베를린 장벽(Berlin Wall)

동독이 건설한 것으로서 서베를린을 동베를린과 그 밖의 동독으로부터 분리하는 장벽이었다.

ⓒ JHVEPhoto/Shutterstock.com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985년 3월 11일 고르바초프가 새로운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했다. 체르넨코 전 서기장의 장례식인 3월 14일에는 서독의 콜 수상이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최초로 회담할 기회가 있었고, 서독의 겐셔 외상은 1986년 7월 소련을 방문했다. 방문 후 겐셔 외상은 고르바초프 서기장을 '새로운 유형의 소련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독소관계는 그 후에도 바이제카 서독 대통령의 소련 방문 등으로 이어졌는데 실질적 회담은 1988년 10월 24일 콜 수상의 소련방문이었다. 이 방문에서 서독은 외상을 비롯한 환경상, 국방상, 농림상 등이 동행하여 두 나라 사이에 다방면에 걸친 실무적 협력 방향을 논의하고 관계의 긴 밀화를 다져 나가게 되었다.

1989년 6월 12일 고르바초프가 서독을 방문했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서독과의 관계 강화를 중시한 배경에는 경제 문제가 있었다. 고르바초프가 정권에 취임한 지 4년이 되어 가고 있었으나 국내 경제상황이 개선되지 않아 소련시민의 불만이 높아져 가고 있었으며, 국내 개혁을 위해서도 서독과의 경제관계의 강화가 대단히 중요했다. 고르바초프는 서독 방문 중 투자보호협정을 체결하는 등 양국 사이에 경제 시스템을 개선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 밖에도 두 수뇌는 대미 관계, 동유럽 정세, 군비관리, 군축 문제 등의 국제 문제와 양국 사이의 여러 문제에 관해 상세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 회담을 통해 양수뇌는 깊은 신뢰 관계를 쌓게 되었다. 6월 13일 밤 콜 수상 부처는 고르바초프 서기장 부처와 라인 강변의 수상 방갈로에서 만찬을 들었다. 만찬이 끝난 후 한밤중에 양 수뇌는 유람선에 올라 라인 강을 따라 내려가서 전방의 로렐라이 언덕을 조망하며 양국 관계와 삶에 대한 감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콜은 그날 밤을 자신에게 있어 획기적인 경험이라고 얘기했으며, 고르바초프도 그렇게 추억했다.


헝가리와 폴란드의 민주화운동은 중앙 유럽의 다른 나라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헝가리는 1989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동독 국민의 서독으로의 대량 이주의 루트가 되어 동독의 공산당 정권을 동요시켰다. 동독에서는 1971년 이래 사회주의통일당(공산당, SED)의 서기장인 호넥커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동유럽 국가 중에서 동독의 경제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이었으나 서독에 비하면 가난했다. 분단국이었기 때문에 동독 국민이나 정부 모두 서독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동독 정부는 교류를 금지하고 정보를 차단하려 했으며 서독의 실태를 비판, 비하하는 선전이 되풀이되었다. 대부분 지역에서 서독의 TV 수신이 가능했으며, 서독의 동방정책을 통한 유화적 교류와 CSCE의 영향으로 서방측 정보가 동독에 도달하는 것을 저지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베를린 벽'은 정보의 흐름으로 보면 이미 무너져갔던 것이다.

1988년 5월 헝가리 공산당의 전국협의회에서 카다르가 퇴진한 후 개혁파 네메드의 지도체제가 확립되었다. 1989년 그는 '난민조약'에 가맹신청을 하게 되었는데, 난민의 지위에 관한 이 조약은 1951년 UN이 주최한 회의에서 채택된 것으로 난민의 인권보호와 난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권옹호의 관점에서 난민을 박해 하는 나라에 난민을 송환하면 안 된다는 규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네메드가 난민조약 가입을 제안한 것은 직접적으로는 루마니아의 헝가리계 주민의 유입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쪽 이웃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의 독재체제하에서 경제위기가 심각했고 서부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헝가리계 주민이 국경을 넘어 헝가리로 도망하는 움직임이 강화되어 헝가리 정부의 재정부담이 증대했던 것이다. 네메드 정권은 난민조약에 가맹함으로써 UN의 원조를 요구하려 했다.

한편 헝가리는 개혁, 개방 정책의 하나로 오스트리아 국경의 철조망 등 국경설비를 철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헝가리 당국의 국경 경비는 계속되었기 때문에 국경을 넘어 오스트리아로 가는 것이 실제로는 용이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러한 헝가리의 조치는 동서 간의 벽이 낮아졌다는 심리적 효과를 커지게 하여 동독인들이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에 탈출하는 수를 상당히 증가시켰다. 하지만 다수의 동독 시민이 더욱 확실한 길로 선택한 것은 동독 주재 서독대표부나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의 서독대사관에 농성하면서 서독 이주를 요청하는 탈출 방법이었다. 8월 중순에는 헝가리에 체류하고 있는 동독 국민이 20만 명에 달했다. 헝가리 정부는 난민조약에 가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독 국민을 불법입국자로서 본국으로 송환하는 일은 허락될 수 없는 일이었고, 또한 그럴 의사도 없었다.

하지만 서독 정부는 위기를 자초할 생각은 없었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기조에 따르면 일시적인 이익을 얻고자 동서 간의 장기적 우호관계를 희생하는 것은 안 되는 일이었다. 8월 초 서독 정부는 폭주하는 동독 주민의 망명요구에 대해 동방정책의 전례에 따른 조처를 했다. 총리실장은 성명을 통해 망명을 원하는 사람들은 합법적인 이민절차를 받을 때까지 동독에 있으라고 하면서 적어도 재동유럽국가 독일대사관에 숨는 일은 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1989년 7월까지 4만 6,000명의 합법적 이주가 허락되었음을 지적했다. 콜 총리는 기자와 만나, 그와 호네커는 '우호적인 정책'을 지속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지만 동방정책에 의한 과거의 처방은 이미 더는 듣지 않았다. 게다가 동독의 가족들이 탈출하는 모습이 연일 서독 언론을 장식함으로써 동독 인민들을 자극했다.

8월이 지나면서 콜 정부는 동방정책에 따른 동독난민정책을 서서히 바꾸어 나갔다. 동방정책 목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었다.

(1) 동독인들에게 합법적인 이주를 권하는 동시 동독 정부에 여행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 줌으로써 상황을 개선하도록 권고한다.
(2) 불가피한 경우에만 난민들을 수용하며, 서독에 이주한 후 살고자 하는 난민은 강제 송환할 수 없다.

그러나 8~9월 동독 주민의 서독으로의 대규모 탈출에 따라 서독 정부는 새로운 정책을 취했다. 이들 하나하나가 모두 동방정책의 정신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1) 동독의 법을 위반하더라도 동독인들이 서방에 도착하도록 도와준다.
(2) 동독 정부에 압력을 가해 근본적으로 정치 및 경제 개혁의 하나로 여행 관련법을 개정할 것을 권고한다.
(3) 하지만 동독 정부를 공개적으로 난처하게 하거나 자극하는 일은 피하도록 한다.

사민당을 비롯한 동방정책의 옹호자들은 정부가 난민을 받아들임으로써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1989년 여름 동안 서독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독일 통일을 공식적으로 포기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을 벌였다. 하지만 국제정세의 흐름은 이미 동방정책을 포기하도록 전개되고 있었다. 소련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이 낳은 동유럽의 민주화운동은 서독의 보수적 할슈타인 정책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체제를 해체했으며, 그 해빙 물결은 동독에도 이미 밀려들어 왔던 것이다.

9월 10일 동독에서 반(反)체제 그룹이 '신포럼(Neues Forum)'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10월 2일 동독의 제2도시 라이프치히에서 참가자가 만 명이 넘는 민주화 요구 데모가 일어났다. 동독의 복음파교회는 호네커에 서한을 보내어 "대량 출국의 원인은 국민이 기대했던 사회변혁이 거부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대화와 개혁을 요구했다. 한편 라이프치히에서는 매주 월요일마다 시위가 일어나 '신포럼'의 합법화 등을 요구했다. 시민은 '고르비'각주1) 를 외치면서 "우리는 개혁을 위해 국내에서 싸우고자 한다."라고 호소했다.

고르바초프는 10월 7일 베를린을 방문하여 동독지도자들과 회담하면서 동독의 페레스트로이카를 권했다. 여기서 고르바초프는 '뒤늦게 오는 자는 인생에서 벌을 받는다.'라는 러시아의 속담을 인용했다. 호네커는 개혁요구에는 입을 닫으면서 동독의 발전에 대한 말만 늘어놓아 고르바초프의 냉소를 자아내었다. 그 뒤 두 사람은 단독회담을 했는데, 그 내용은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고르바초프가 '개혁이냐? 은퇴냐?'라고 압박한 것이 아닌가 관측되었다. 그날 밤 시민 수천 명이 데모를 하고 다시 '고르비'를 외치면서 개혁을 요구했다.

드디어 SED는 10월 10일 정치국 회의를 열어 다음날에는 대화의 필요성과 함께 당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호네커 체제에 반대하는 의사를 밝혔다. 18일에는 호네커의 해직이 결정되었다. 후임 서기장에는 크렌츠가 임명되었고, 11월 8일에는 당 중앙위원회가 지도부를 대폭 교체했다. 크렌츠 서기장은 당과 정부의 분리, 집회, 결사법의 정비, 미디어법의 정비, 비밀투표에 의한 선거법 정비, 시장원리를 도입한 경제개혁 등 민주화 방침을 내어 놓았다. 그러나 출국 수속 완화에 대한 사항은 동서독 전문가위원회 설치를 제안하여 결정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 조치는 사태가 긴급하게 돌아가는 것에 비해 너무 지체되어 다음날 밤에는 국경의 개방이 실현되고 말았다.

정부는 11월 6일에 신여행법을 마련하여 발표했으나 여전히 엄격한 제한을 둔 내용이었기 때문에 SED 내에서도 비판의견이 커서 7일에 인민의회는 그것을 부결했다. 크렌츠는 새 법이 성립될 때까지 잠정규칙을 마련하도록 슈토프 수상에게 지시했다. 9일 중앙위원회의 오후 토의 직전에 슈토프는 잠정 규칙안을 크렌츠에게 건네었다. 크렌츠는 '잠정적'이란 문구를 삭제하고 중앙위원회에서 그 안을 그대로 읽었고 승인을 받았다. 삭제 이유는 '잠정조치'가 되면 그것이 유효한 동안 시민이 국경으로 쇄도할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 정치국원으로 제1서기였으며, 당의 공보관이었던 샤보브스키는 그 규칙안이 각의에서 이미 결정된 것이라고 착각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기자회견에서 샤보브스키는 동독 국민은 누구던 국경을 건너 출국할 수 있도록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언제부터 실시되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개인 여행 이건 국외 이주건 자유로워졌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이 결정은 지체하지 않고 즉각 실시된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었다. 당의 방침은 '다음 10일부터 출국을 희망하는 동독 국민은 출국 비자를 신청할 수 있으며, 그 비자가 취득되면 자유로이 출국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출국 비자는 경찰에 신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잠정 규칙 안에는 출국 비자의 수속이 필요하다는 것을 빼놓았던 것이다. 또한, 이 서류는 10일부로 되어 있었으나 기자회견은 9일 밤 행해졌다. '즉각'이란 표현은 실제로 다음날 10일부터였던 것이다. 이제까지 동독 국민은 같은 사회주의국가들인 동유럽에는 여행할 수 있었으나 그 이외 국가들에는 자유롭게 나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비자신청만으로 출국할 수 있다는 결정은 충분히 획기적인 조치였으나 샤보브스키 정치국원의 발표를 듣고 있던 내외 기자들은 '동독의 국민은 바로 지금부터 자유롭게 출국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이 빅뉴스는 곧바로 속보로 발표되었다.

이 뉴스를 동독 TV가 전했으나 동베를린 시민은 처음에는 별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으나 서독의 제1방송 ARD가 오후 8시 뉴스로 전하게 되자 즉각적으로 동베를린 시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래 이 잠정안은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출국하려는 동독 국민을 상정해서 작성된 것이었으나 국경선에 제일 가까이 접경한 베를린 시민을 직격했다. 베를린을 동서로 분단하는 벽의 검문소 앞으로 동베를린 시민이 즉각 몰려들기 시작했다. '출국의 자유화' 등 보고를 받지 못했던 검문소의 경비병들은 애초 시민의 통과를 거부해 보았으나 '출국은 자유화되었다!'라고 외치면서 밀고 들어오는 큰 무리의 군중에 밀려 밤 11시부터는 검문소를 개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베를린 시민은 환호성을 지르며 서베를린에 쇄도해 들어왔다. 베를린 벽 위에는 젊은이들이 벽을 타고 올라가서 춤을 추며 독일 국가인 베토벤 교향곡 9번의 환희의 찬가를 열창하며 독일 국기를 흔드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그중에는 망치로 벽을 부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제 동독 당국이 이것을 저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베를린 벽이 붕괴하면서 동독으로부터 연일 2,000명 이상의 동독 국민이 서독으로 도망했다. 동독이라는 국가 자체가 더는 존속할 힘을 상실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1년 가까이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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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인석 집필자 소개

1959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졸업, 196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사과 박사학위 취득, 1970년 서울대학교 서양사과 전임, 2002년 서울대학교 정년퇴임, 명예교수 취임, 2000-2002..펼쳐보기

출처

세계현대사
세계현대사 | 저자오인석 도서 소개

유럽과 미국, 중국, 일본, 중동,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전 지구 지역을 포괄하는 글로벌한 현대 역사를 서술하고자 했다. 세계사적 문맥 속에서 전 지구적 규모의 현..펼쳐보기

































2019.6.12 수요일여행10일차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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